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드릭 페르부르트 (문단 편집) == 총리 == 총리에 오른 페르부르트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심화하는 데 있어서는 그야말로 일등공신이었다. 당연히 국제 사회의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고, 이를 무마하고자 아파르트헤이트를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흑인과 백인 간의 좋은 이웃 관계를 형성하는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흑인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 대접까지 다 그만두겠다는 정책이었고, 이후 남아공은 급속도로 고립의 길을 걷게 되었다. 특히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이 바로 일명 "흑인자치정부촉진법"이었는데, 이 법을 시행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남아공의 인구 때문이었다. 비록 백인들이 실권을 쥐면서 흑인을 노골적으로 탄압했지만, 정작 백인들은 인구의 10%에 지나지 않았고 흑인은 오히려 80%나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흑인들을 격리시켜도 인구의 대부분이 흑인이라는 사실은 본인들에게 큰 눈엣가시였다. 이 법을 시행함으로서 대부분의 흑인들은 특정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되었고, [[반투스탄|그곳을 남아공에서 아예 독립]][* 단 몇몇 지역은 [[홍콩]]처럼 고도의 자치권만 주고 독립은 안 시켰다.]시켰는데 그 땅은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였다. 이 정책 덕에 백인은 남아공 인구의 다수가 되었고 남아공 국적을 박탈당한 대부분의 흑인들은 기껏 남아공에 와도 외노자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황무지에서 흑인들이 자립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나라들(일명 [[반투스탄]]) 또한 남아공이 제멋대로 영역을 조정하는 등 여전히 남아공의 입김은 강했다. 당연하지만 의도도 그렇거니와 국제 사회에서는 이러한 반투스탄을 [[미승인국가|정상적인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고]] 남아공의 [[괴뢰국]]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오히려 백인들에게조차 내부 분열을 조장했는데, 당시 남아공은 표면적으로 엄격한 개신교 국가를 표방했고 "도덕성"을 핑계로 '19금'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은 모조리 금지했다. 이에 불만을 품던 몇몇 백인들은 아예 반투스탄으로 이주하였고 여기다가 [[카지노]] 등을 차렸는데 당연히 19금을 즐기려는 [[백인]]들은 여기로 몰려들었고 심지어 [[흑인]]들과 [[섹스]]라도 해서 쾌락을 즐기려던 몇몇이 아예 여기서 그것을 실천에 옮겨 어마어마한 흑백 혼혈을 양산했다. 당시 남아공 정부는 자신들의 아파르트헤이트가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결국 생각보다 오래 못 간 채 끝나 버렸고 이후 이렇게 해서 생긴 [[흑백혼혈]]들은 현재 남아공의 대표적인 사회 문제로 남아 있다. 또한 페르부르트는 [[텔레비전]]을 매우 혐오해서 도입을 금지했으며, "텔레비전은 [[독가스]], [[핵폭탄]]과 같다"는 막말까지 남겼다. 그래서 남아공의 텔레비전 방송은 발타자르 포르스터르 총리 시기인 [[1975년]]에 시험 방송을 거친 뒤 [[1976년]] [[1월 5일]]에야 남아공의 공영방송사인 [[남아프리카 방송공사|SABC]]에 의해 [[https://youtu.be/c2aymzmRclM|본격적으로]] 개시되었다.[* 실제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페르부르트가 죽은 후에 있던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라이브로 볼 수 없는 극소수의 국가 중 하나였는데, 이에 언론의 비판이 거세자 남아공 정부는 굴복하며 달 착륙 장면의 녹화된 영상을 제한적으로 볼 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물론 이 녹화를 중계한 뒤에는 다시 TV 방송을 금지시켰지만.][* 이는 현 시점에서 세계 최빈국인 [[콩고민주공화국]](1966), [[중앙아프리카공화국]](1974), 심지어 '''[[부룬디]]'''(1975) 같은 나라들보다도 늦은 것이다.] 1976년 당시는 흑백 TV에서 컬러 TV로 바뀌어 가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처음부터 컬러로 방송을 시작했다. 페르부르트 치하에서 남아공은 아예 고립당했다. 당시 남아공은 [[남아프리카 연방]]이라는 이름의 [[영국]] [[자치령]]으로, 사실상 독립국가나 다름없었지만 명목상 [[대영제국]]의 자치 공동체로서 [[영국 국왕]]이 [[남아프리카 연방]]의 국가원수를 지내고 남아공인 중에서 임명되는 [[총독]]이 그의 대리인이며 현지 의회에서 총리를 선출해 그가 정부 수반이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영국은 비록 별 효력은 없어도 독립국가보다는 비교적 쉽게 남아공에 압력을 가할 수 있었다. 실제로 [[해럴드 맥밀런]] [[영국 총리]]가 암묵적으로 남아공의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취지의 연설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페르부르트는 영국의 인종차별 관련 간섭을 피하기 위해 자국을 독립 공화국([[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전환하려고 했다. 페르부르트는 곧바로 이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영국마저 이렇게 극악무도하게 나아가는 남아공을 포기하기를 원했기에 공화국 전환은 매우 수월하게 추진되었다. 마침내 [[국민투표]]를 거쳐 [[1961년]] 남아공은 [[영연방]]에서 탈퇴한 후 [[공화국]]이 되었다. 허나 인종차별과 반공을 기치로 한 독재에는 큰 변함이 없었으며, 오히려 이 시점을 계기로 남아공은 [[올림픽]]을 비롯한 국제 스포츠 대회의 출전이 금지됨에 따라 더더욱 고립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기독재가 이어지고 [[텔레비전]]도 도입을 거부하는 등 극도로 억압적인 정책을 펼치면서 백인들조차 그에게서 등을 돌리려는 조짐이 나타났다. [[1960년]] [[https://en.wikipedia.org/wiki/David_Pratt_(assassin)|데이비드 프랫]]이라는 '''영국계 백인'''[* 사실 흑백갈등에 가려져서 그렇지, [[보어전쟁]]의 영향 탓에 영국계 백인들과 독일계, 네덜란드계 백인들도 사이가 썩 좋지는 못했다. 가령 아파르트헤이트를 다룬 영화인 ‘[[파워 오브 원]]’에서는 주인공이 어렸을 적 사정으로 영국계 학교를 가지못하고 독일계 학교를 갔는데, 독일계 학생들에게 '''오줌통'''이라 불리며 왕따와 멸시를 당해 큰 충격을 받고 시골로 가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이 페르부르트를 총으로 쏴죽이려다 불발로 그쳤다.[* 사업가이자 반 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로 법원 청문회에서 아파르트헤이트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독재를 강행했으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